
#1. 길(1969년)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그러하시지만, 나도 초임의 선생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 아니 세월이 갈수록 더 또렷이 다가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중학교 입시에 낙방한 재수생을 포함한 6학년 학생 34명이 21살 총각 선생인 나의 얼굴에 눈을 맞추고 있었다. 쉬는 시간 종소리도 지났고, 정규 시간 6차 시도 지났다.늘상 있는 일이지만, 나는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애들에게 다시 한 번 더 다짐을 둔다.
“저녁에 보자, 너그 집에서 내 초까지 가지 오이라.”
오늘도 학업성적 11위부터 34위까지의 아이들 24명을 담임선생님인 내가 빌려 놓은 하숙집 두 개의 방에 모일 것을 약속하고 헤어진다. 전기는 물론 시계조차 귀하던 때였지만, 공부보다 친구들과 같은 방에서 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어린이들은 7시에 정확하게 모인다.
학교 근방의 아이들은 그래도 편하지만, 걸어서 2킬로미터 떨어진 아이들이 밥 먹고 양초 한 개씩을 들고 다시 온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7시 30분부터 시작되는 야간 학습은 한 개의 방에서 먼저 가르치고 문제를 내어 주거나 외우게 한 다음에 다른 방에서 같은 방법으로 가르치고 자습하게 하여 9시 30분까지 공부한다.
촛불 아래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콧구멍은 항상 시커멓게 되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이 없다. 선생님이 중학교를 가게 해 준다는 믿음도 있지만 취침시간의 장난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선생의 엄명에 따라 눈을 감고 있지만 특유의 어린이들 장난은 제지하기가 어렵다. 선생의 고함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반복되면서 잠이 든다.
새벽 무렵, 오줌을 참지 못해 자는 친구의 얼굴에 싼 일, 자기도 몰래 오줌을 싸서 한 방 친구들의 팬티를 모두 젖게 한 일, 아침밥 먹으러 집에 가다 잠이 부족하여 벼 짚단 속에서 잠이 들어 학생들 모두가 찾아 헤매던 일들이 생각난다. 밤낮을 가르치고 지쳐도 행복했던 순간들이다. 모처럼 옛날의 초임학교를 방문한 나는 운동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낡은 중장비 잔해를 보다가 멀리 보이는 그 길을 쳐다본다.
아이들이 하루 세 번씩을 오고 가던 송진포와 궁농 간의 언덕길이다. 그리고 어느새 발길을 돌려 천천히 걸어 본다. 그 길은 약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길 폭과 그때의 자갈, 그때의 풀들이 여전한 것 같다. 그때 이 길을 같이 걸었던 아이들이 이제 50대 중반으로 선생과 담배를 같이하고 음담패설을 같이하며, 같이 늙어 가고 있다.
#2. 편지(1974년)
그해 유달리 바람이 잦았다. 거제도의 끝자락 해금강, 백년이 넘는 동백나무 고목 숲 사이에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양철 지붕 집. 학교 장부상에는 오래 전부터 없어진 학교의 옛날 사택. 그곳에서 27살의 청년이 휴일 아침 동백나무 틈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에 편지를 읽는다. 몇 번이고 읽은 편지를 또다시 읽으며 눈물을 흘린다.
눈물이 흘러 편지지에 떨어진다. 이제 떨어진 것과 앞서 떨어진 눈물의 얼룩으로 편지지가 뻣뻣하다. 냄새나는 방으로 돌아와 사계절을 한 채로 버티는 누더기 같은 이불에 몸을 감싼 채 옆으로 누워 본다. 그래도 눈물이 난다. 한 무더기의 동백나무 바람은 헐렁한 창문과 장단을 맞추고 지나간다.
읽고 있던 편지의 발신인 이야기는 그로부터 두어 달 전의 일이었다. 거제 해금강이 조금씩 전국에 알려 질 무렵이었는데, 마산의 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한 일본 기업체의 남녀 직원 8명이 관광차 이곳으로 왔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오가지도 못하여 허름하지만 방이 많은 이곳으로 내려왔다. 며칠 동안 방을 빌려 준 고마움으로 식사와 음료를 같이 먹게 되었고, 다들 젊은 처지라 자연스레 대화도 나누게 되었다.
일행 중 자그마한 키에 동그란 얼굴을 가진 수수한 처녀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주 눈길을 보내 주었다. 말도 붙이지 못하고 조마조마하다 떠나보낸 뒤 후회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불어오는 해금강 동백나무 숲의 바람 속에서 마음의 상처와 외로움으로 가득 찬 나는 뒤늦게서야 그때에 용기 없었음을 크게 탄식했다. 그리고 몇 날을 생각하다 잊어 버렸을 무렵에 그 편지가 도착한 것이었다.
어느 날 두툼한 편지 봉투를 쑥 내민 학교의 전달부 아저씨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지나가고 전학 서류일 거라 무심히 뜯어본 나는 가슴이 메이는 것 같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또박또박한 글씨로 써 내려간 세 장의 편지 속에는 그녀가 바라보았던 나의 모습, 나의 심정이 너무나 잘 나타나 있었다.
“외로움이 눈가에 조롱조롱 맺혀 있는 당신의 얼굴에서…….”
빠르게 읽었다. 천천히 읽었다. 쉬는 시간에도 읽었다. 수업시간에 자습을 시켜 놓고 읽었다. 수업을 마치고 또 다른 내용이 있다는 듯이 또 읽었다. 그 문장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읽었다. 고통과 번민, 그리고 외로움으로 가득 찬 나에게 생전 처음 여자로부터 받아 보는 편지에 빠져 버린 것이다.
몇 날을 통해 쓰고 지우고 또 쓴 편지를 주소에 따라 보냈다. 그러나 일주일 지나도, 보름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답장은 없었다. 지금도 간혹 해금강을 들르게 되면 어렴풋이 동그란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때 무엇에 그리 암울해 하고 방황했던 나의 젊은 모습이었는지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