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과 카니발
사순절과 카니발
  • 거제신문
  • 승인 2009.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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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강 목사-옥포교회 담임목사

화려하고 의상, 요란한 음악, 육감적 몸짓으로 본능에 충실해 보이는 브라질의 축제 카니발(carnival)이 뜻밖에 금욕과 고행의 사순절(Lent)와 관계되어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브라질의 해변도시 리우데자네이루에는 광란의 축제가 벌어집니다.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쌈바 축제에 대한 뉴스는 지구 반대편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젠 낯설지 않습니다.

전 계인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는 화려하고 거창한 축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축제 기간에는 온 시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오고, 비키니에 현란한 장식을 치장한 여인들이 경쟁적으로 요란한 춤을 춥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화려하고 육감적인 카니발 축제의 배경에는 사순절이 있습니다. 축제의 기간은 늘 사순절 직전에 이루어집니다. 사순절은 해마다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금욕과 단식을 하며 신앙의 훈련을 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그 사순절 기간 동안의 금식 혹은 금욕을 앞두고 이들은 카니발을 통해 마지막 육감적인 본능을 충족시키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순절(四旬節) 고행에 동참하기 전 잠깐 실컷 노는 시간을 삼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카니발은 언제나 사순절이 시작되기 3-7일 전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서 바라보면,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카니발의 장면은 썩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사순절과 카니발은 잘 어울리지 한 쌍의 조화가 아닙니다. 둘을 연결시키는 것이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발적 금욕이 아닌 강제적 금욕이 얼마나 위선적인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중의 하나가 자발성인데, 자발성이 없는 경건은 위선일 뿐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발성이 없는 금욕은 고역일 뿐이지 참다운 경건의 훈련이 될 수 없습니다. 자발성이 은밀함으로 이어지고, 은밀함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 중에 자발성과 은밀함이 상실한 유대인들을 향해 위선자, 외식하는 자(마태6:2, 마태6:5, 마태6:16)라고 질책하셨습니다. 여기 외식하는 자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는 본래 연극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이중인격자 혹은 위선자라고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자발성과 은밀함을 상실하면 구제든 기도든 금식이든 연극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아이들 말로 ‘쑈를 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그 뜨거운 피에 담긴 죽음보다 더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묵상하고 동참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기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으로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갈 수 있기를 사모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내 안에 남아 있는 위선과 거짓과 교만을 내려놓고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기를 소망합니다.

자발적으로, 그리고 은밀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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