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무진 기사 생 혼신(영혼)아 왔거들랑~ 염불 받아 품에 품고~ 마니묵고(먹고)~ 돌아가소!
330여년을 살아오는 생활속에서 어디에다 의지하며 자기의 삶을 의탁할 곳이 없었던 그 시절에는 하늘의 신과 바다의 신과 나무의 신과 돌의 신(즉 우상들)을 최고의 구세주로 믿고 가정과 자녀들과 인생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빌며 삶을 영이해 온 우리의 조상들이었다.
이러한 삶의 생활속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벼선굿이었다. 그러면 위의 60갑자는 무슨 이유에서 외우는 것인지 알아보자.
이렇게 60갑자를 다 들먹거리면서 외우는 이 염불소리는 조상 때부터 굿 하던 날까지 돌아가신 동(洞)네 모든 영혼들을 불러서 굿 장안에 모셔놓는다. 그러면 동네사람들은 굿판을 시작할 때부터 자기 집에 제사가 있는 대로 밥상을 차례 놓는다.
그리고 이 밥상을 무당들이 굿을 마치는 날까지 두었다가 마지막 날 탈굿을 할 때 무당들이 영혼들을 돌려보내며 물밥을 뿌리는 과정에서 마지막 신풀이로 영혼들에게 하는 염불소리이다. 이 벼선 굿을 하고 있던 곳은 거제도 동쪽 편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남 거제시 일운면 망치리 양화정(부락)이다.
양화, 망치에서 유래되어오는 실화이며 유행어의 방언에 속하는 말로 이 지방에는 이런 재미있는 말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그러면 양화 망치에서 이 방언에 속하는 말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원인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330년 전 양화정에는 손씨가 먼저 들어오고 다음이 이씨가 들어왔고 그 뒤로 최씨 안씨 박씨 채씨 우씨 강씨들이 차례로 들어와 부락이 형성이 됐다.
그리고 차츰 주민들이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양화정은 산골 어촌이라 모든 삶이 궁핍한 생활이었으므로 어디 의지 할 곳을 찾던 양화정 사람들은 신을 정하는 나무를 선정하여 동네 앞산에 있는 큰 나무 한 그루를 정해놓고 비손을 한 것이 당산이고 들 입구에다가 정자나무를 심어 놓은 것이 벼선덧거리이다. 이 두 곳에 동민들은 음력 초 정월달이 되면 동네와 자기가정의 평안과 안녕을 빌었다.
이렇게 처음에는 간단히 산신과 용왕신을 섬기면서 목신과 바다 신에게 자기의 가정과 자녀들과 자신의 평안을 빌며 살았다. 그러다가 점차 세월이 지나면서 산신과 용왕신은 동네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많은 것을 차리라고 마음을 충동질을 하였다.
동네사람들은 해가가면서 다음 굿 때에는 생각나는 대로 많이 차리고 굿을 크게 하는데 안간힘을 쏟았고 이렇게 굿을 크게 하므로 마음의 위로를 더 받는 쾌거를 확인하면서 당산 굿, 벼선 굿으로 굿이 발전하였다. 이 굿판 속에 산신 용왕 신 이 들어있었다. 이렇게 굿판이 커지다보니까 예산문제에 봉착되어 1년에 한번씩 굿을 하던 것을 3년에 한차례씩 큰 굿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웃 동네인 망치에서도 큰 당산 굿을 하고 있었다. 이웃 동네인 망치에서는 4년마다 한차례씩 벼선 굿을 하고 있었다. 두 동네에서 굿을 하면서 해가 지나고 보면 양 동네인 양화, 망치에는 같은 년도에 같은 시기 초 정월달에 굿을 하게 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이러다보니 먼 이웃동네에서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신통하기 그지없었고 재미있는 이야기꺼리가 되고도 한참이나 남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이런 재미있는 사건이 긴급 뉴-스가 되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은 꼬리를 물고 산을 넘고 내 (川)를 건너서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전파되고 말았는데 이 뉴스가 바로 “양화정도 굿 나고 망태도(망치) 굿 났다” 하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동네안녕을 위해 굿을 하다보니 우연히 세월과 함께 재미있는 속담 아닌 방언으로 유래되어 어느 곳에서든지 불식간에 같은 일이 이쪽에서도 발생되고 저쪽에서도 발생되면 “양화정도 굿 나고 망태도굿 났다”를 약자로 말해서‘야화정 망태 굿 났다’ 로 어쩌다보면 비웃는 말로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방언을 사용하게 되었고 유래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차피 벌린 굿판이니 지금 이 당산 굿 속으로 한 번 들어가서 굿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기로 해보자. 굿을 할 시기인(음력)정초가 되면 우선 구장(지금은 이장)이 동회(洞會)를 소집하여 굿 계획을 세우고 먼저 생활 속에서 궂은일을 하지 않은 깨끗한 사람 한명을 정하여 산신과 용왕 신에게 정신 드리는 일을 마낀다.
그런 후에 무당이 굿 날을 받아 주면 동네에 공포하고 이 때부터는 정신 드리는 사람은 매일 목욕재개하고 정신을 드리는데 이 시기에는 음식도 함부로 먹어서는 되지 않지만 아무 곳이나 함부로 다녀서도 안 되는 동네의 안녕을 책임지고 있는 중요한 사람중의 한 사람 이었다.
이 시기의 동민들은 잔치 아닌 잔치 분위기로 마음들이 들떠있었다. 굿 날을 받고나면 동네로 들어오는 입구 길목 좌우에는 깨끗한 돌에다가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 이란 글을 써서 세워놓는다.
그리고는 긴대나무를 베어다가 길 양쪽에 세워 짚으로 새끼를 꼬아서 금줄을 쳐놓으면 그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들, 특히 임신부는 굿이 시작 할 때까지는 절대로 이 길을 통과를 해서는 안 되는 엄중한 시기다. 이 때에는 지나가는 길손들과 이곳을 지키는 동네 젊은 청년들과의 시비가 붙어 결국에는 길손들은 동네외각인 바닷가로 둘러서 가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발생하고 있었다.
그 때에는 망치 양화 동부면 수산으로 가는 길은 숲이 우거진 오솔길이었는데 나그네들이 이 길을 잘못 들어 왔다가는 큰 고역을 치르는 상항이 벌어지곤 했었다. 굿을 하는 날에는 통영에서 굿 쟁이들이 약10명 정도가 오는데 이중에서 무당이 2명(큰무당. 작은무당) 무배들 6명(타악기 반주자들) 정도 그다음은 차량이 없었으니 굿 짐을 운반하는 짐꾼들이 따라온다.
이렇게 해서 굿 준비가 다되어 날짜가 되면 먼저 굿 무배들이 동네입구에서부터 한마당 농악으로 온 동네에는 물론 산신과 용왕신에게 굿을 한다는 선전포고를 하는 농악을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크게 친다.
그리고 서서히 동네 굿 장으로 들어오면서 동네 안에 중요한 우물가 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다니면서 농악으로 신명풀이를 하는데 그때에 동네 개구쟁이들과 신명 있는 사람들은 농악 판을 따라다니며 한판 신명의 절정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선전포고인 농악 판이 끝나면 당산으로 들어가서 굿자리를 펴고 동네 유지들과 동민들은 모두모여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굿 구경을 즐기기를 원하고 신께 복을 비는 아낙네들은 갑자기 겸손으로 그 자세가 틀린다. 큰 무당은 큰머리라 해서 족두리를 쓰고 크고 넓은 부채로 흔들면서 상 돈을 이 부채로 받아 큰 징을 돌려놓고 그곳에다 넣는다.
그리고 무배들은 각자 맡은 악기를 치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친다. 이렇게 멋진 타악기 반주를 하는 굿패들을 지금 어느 굿판에서 어느 농악 판에서 볼 수 있을까. 정말 기막힌 반주를 했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혀 신명이 절로 나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바로 사람의 혼을 뺀다. 그러니 귀신들이 얼마나 좋아했고 유혹을 받았겠는가 말이다. 장고와 징은 울리는 소리가 없이 딱끄닥 딱그닥 하는 악보 없는 반주로 그 무당의 염불소리를 멋 떠러지게 맞춰나가며 그중에 작은 피리소리는 굿판에 모인 귀신들의 애달픈 허영심의 극치를 연출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동네 구경꾼들의 애간장도 다 태운 굿판의 피리소리였다. 그리고 무배들이 치고 부는 북과 큰 통수와 괭가리로 분위기를 잡아나가면 이 이상의 타악기연주 앙상블이 어디에서 볼 수 있는 연출이 되겠는가 말이다.
굿은 장소를 옮겨가며 약7일을 한다. 이 때에의 동네 분위기는 모두가 잔치에 젖어 굿판에서 떠나지를 않고 꼬박 밤을 지새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이렇게 굿을 일주일간을 하고 마지막 날에는 굿판에 모여든 모든 돌아가신 영혼들을 60갑자대로 불러서 아쉬움 속에서 물밥을 뿌릴 때 아낙네들은 두 손을 비비며 자기 가정에 돌아가신 가까운 영혼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눈물을 훔치는 애절함과 원통함으로 애간장을 태우는 석별을 한다. 이렇게 60갑자 염불의 애통 속에서 영혼들을 보내는 순서로서 장장 7일간의 굿은 끝을 맺는다.
이 멋진 굿판의 주인공들이 지금도 통영에 상주하고 계시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 인간이 삶을 영이해 나갈 때 영육 간에 사로잡혀 피해가 되지 않는 범이 내에서 타악기연주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나가는 것도 가히 외면 할 것도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