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갑게도 일본에 사는 후지타 유코상이 보내온 것이었다. 전시회를 마치고 보냈던 리플릿을 보시고 미리 알려주지 않아 많이 섭섭했다는 카드 한 장과 붉은 장미 속에 내가 좋아하는 커다란 나리꽃을 중앙에 꽂아 보내온 것으로 봐 분명 특별히 세심하게 주문한 꽃바구니임을 한눈에 짐작하였다. 그녀와 나눈 사오 년간의 우정을 통해 들려준 내 어릴적 담장 사이 핀 나리꽃에 대한 추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후지타 유코상은 나와 동갑인 딸을 둔 여성으로 부군 직장을 따라 한국에 삼년 정도 생활하셨다. 그때 우연히 칼랑코에 화분 하나를 선물하면서 인연이 되었다. 그 뒤 자주 집에 들러 유난히 좋아하던 베란에다 앉아 꽃과 식물들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참 많이 나누며 긴 시간을 친하게 지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안부를 묻는 메일 속에는 내가 꽃과 식물을 좋아하는걸 알고 틈틈이 사진을 찍어 보내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들꽃과 마당에 소담히 피어 있는 한해살이 꽃들이 찍힌 사진을 보면서 유코상도 나 못지않게 꽃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보낸 꽃바구니를 보면서 어릴 적 나리꽃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돌담, 담쟁이 넝쿨,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까지 연이어 떠오른다.
서울에서 강릉으로 이사 온 집은 눈에 띄게 마당을 에워싼 돌담으로 연 짙은 빛깔을 자랑한 담쟁이 넝쿨로 가득했다. 넝쿨 주위 돋아난 풀들이 피워내는 작은 꽃잎들을 세심하게 보면서 좋아했었던 기억이 난다.
사춘기였을까. 시골의 어린 여중생이었던 나는 예민했던 감성으로 잡초가 피운 작은 꽃마저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방에서 책을 읽다 고개를 들면 담쟁이 넝쿨 아래 바람이 이끄는 대로 하늘거리는 한해살이풀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로서 난 한참을 텅 비어버린 사색을 즐기기도 하였다.
담장 너머는 내가 다녔던 중학교와 붙어 있었는데, 그쪽의 돌담은 약간의 둔덕 위에 있어서 높이가 가슴께 정도로 낮은 편이었다. 여렸던 나는 하교할 때는 친구들과 같이 학교 정문으로 나오곤 했지만, 등교 시에는 사람의 눈을 피해 치마를 살짝 걷고 담장을 넘어 학교로 들어가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담장에 자라 오른 넝쿨 잎에 맺힌 이슬로 치맛단이나 허벅지가 젖어도 대수롭지 않게 떨어버리며 누구도 몰래 살짝 넘어가곤 하면서 짜릿한 맘 졸임까지 즐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학교에 가고자 뒷담으로 향했을 때 깜짝 놀랐다. 뒷담 둔덕의 담쟁이 넝쿨들이 깔끔히 베어진 게 아닌가. 어찌된 영문인지를 생각해보던 나는 아버지가 하신 일임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난 텅빈 담벼락을 보며 슬픈 마음만큼이나 눈물을 흘렸다.
분명 나의 담장 등교를 눈치 챘던 것임에 틀림없다. 넝쿨 사이 이슬에 젖는 딸의 종아리를 염려했던 것일까. 뒷담의 아래에는 큼직한 디딤돌까지 올려놓은 아버지의 사려에 멈추지 않는 눈물이 나의 마음을 대신해 주었다.
그때 말끔히 정리된 담벼락 돌 틈 사이로 홀로 남겨진 나리꽃 한 줄기를 보았다.
‘아버지께서도 나리꽃을 좋아하셨나?’ ‘내가 나리꽃 좋아하는 줄 알고 남기셨나?’
그때 본 나리꽃은 내가 지금껏 보아온 꽃 중에 가장 슬프도록 아름다운 꽃이었다. 아마 그때 아버지도 그러는 나의 모습을 숨어 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내 앞에 놓인 나리꽃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셨고 섬세한 마음을 가지셨던 아버지는 담벼락의 넝쿨들을 깨끗이 정리하신 그 다음 해에 다시 담쟁이 넝쿨과 잡초로 무성해진 담장 모습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땐 정문으로 등교했는데 알고 계신지… 주무시듯이 반듯이 누워 언젠가 끼다가 버린 작은 링 반지를 새끼손까락에 끼신 채 입관이 되셨다.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 난 아버지의 섬세한 사랑을 통해 나리꽃이 남긴 그리움과 죽음의 수용을 배워가고 있다. 이런 내면의 모습까지도 아버지를 꼭 닮은 딸이 이제는 간혹 볼 수 있는 돌담에 자란 넝쿨 아래 핀 나리꽃을 보며 날 꼭 닮은 아들들에게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