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일부부가 정신을 차려보니 승용차는 완전히 전복되어 있었고 세 식구는 차창 밑에 깔려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차체가 부서지고 망가져서 문을 비집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밖을 향해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상황속에서 피는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 시간이나 차에서 빠져 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기진맥진해 있는데 몇몇 사람이 탄 차가 사고 난 데일의 차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차가 너무 망가진데 놀라며 “산 사람은 없겠구먼”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차 밑에 깔려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난 이후 한참 뒤에 경찰차가 다가오더니 “지독하게 받아버렸군”하며 “병원 앰블런스와 견인차를 불러야지”하고 가버렸습니다.
데일 부부와 그 딸은 많은 출혈로 인해 탈진된 상태였고,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승용차 한 대가 바로 앞에 멈추더니 한 사람이 내려와서 사고 난 차 주변을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세 사람이나 중상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몹시 놀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구를 꺼내어 이리저리 찌그러진 차 문을 바로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한 사람씩 구출하여 자기차로 옮겠습니다. 혼자서 하느라 땀으로 온 몸이 흠뻑 젖었는데도 중상자들의 머리를 다치지 않도록 주의 하면서 세 사람 모두를 병원으로 옮겠습니다. 두 시간 정도의 응급처치로 세 사람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부서진 차가 있는 데로 다시 가서는 환자들의 소지품을 모두 챙겨다가 병원으로 가져다주고 그들을 극진히 간호하면서 도와주었습니다. 데일 가족은 그 이튿날에야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이 청년은 이들 가족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을 확인하고는 “빨리 완쾌하시기 바랍니다. 힘내십시오.”하면서 병실을 나가더니 소식이 없었습니다.
데일 가족은 자신들의 생명의 은인이 된 그 청년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위경에서 선한 섬김의 손길을 통하여 생명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누가복음 10장 30절 이하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 죽어갈 수밖에 없는 위경에 처한 한 사람을 성직을 수행하는 제사장이 보고 그냥 지나가고, 서기관도 보고 그냥 지나갔는데, 당시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눅10:33-35)했습니다.
위경에 처한 불쌍한 이웃을 보고 사마리아 사람은 외면하고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아름다운 사랑 실천과 섬김의 삶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이같은 선한 섬김의 삶을 보고 예수님을 시험하려던 한 율법사는 사마리아 사람을 정의하기를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21세기의 오늘을 삭막한 세상이라고 합니다. 인정이 매마른 세상이라고 합니다. 훈훈한 인정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시대 속에 정말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많은 공부를 하여 학문적인 업적과 식견이 뛰어난 사람일까요? 아니면 부과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와 명성을 누리는 사람일까요?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많은 것을 아는 사람도,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권력과 명성을 얻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사람은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사람이요, 우리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사람, 우리 이웃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며 마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사람, 이 땅에 선한 사마라아인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