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이 있다.
해방 후 20대 젊은 여성운동가로 시작해 40여년 동안 거제지역의 여성권익 증진과 지역사회발전에 열정을 바쳐온 양길천(85)할머니를 소개하기에 더 없이 좋은 표현이다.
지금은 마을 노인정에서 낮잠을 즐기는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거제에서 봉사활동이나 여성운동을 오래한 사람들의 기억에는 평생 소외된 이웃을 돌보고, 여성 계몽운동을 펼치는 일에 매진한 거제여성운동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할머니가 처음으로 여성운동에 뛰어든 것은 할머니의 나이 25살 되던 해다. ‘한국 부인회 거제군지회 둔덕지회장’이 할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여성운동 활동 이력이다.
할머니의 본격적인 활동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부터 시작된다. 당시 거제지역의 인구는 피난민과 포로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뤘고 할머니의 활동지역인 둔덕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할머니는 “당시 거제지역민들의 2-3배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는데 전시에 먹을 것 입을 것이 없는 피난민들의 구호활동은 고스란히 부인회의 몫 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할머니는 피난민들의 의식주는 물론 가끔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의 치료까지 도왔다. 비록 적군이었지만 굶주리고 부상당한 그들을 외면 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구호활동을 위한 교육과 연수 때문에 매주 군청을 방문해야 했다. 당시 거제군청은 장승포에 위치했는데 할머니가 활동하는 둔덕지역에서 왕복 10시간 이상을 걸어야 가능한 거리였다. 남다른 사명감 없이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지만 할머니는 한 번도 빠짐없이 회의나 연수에 참가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할머니의 나이 29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4남매와 집안 살림을 챙겨야 했지만 할머니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피난민들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굶주림 이었다. 비록 넉넉하지 못한 구호물품이었지만 할머니를 비롯한 부인회 회원들의 정성어린 구호활동은 피난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남겼고 피난생활을 마치고 돌아 갈 때는 할머니께 감사패를 수여했다.
피난민 중에 고향과 가족을 잃고 거제지역에 정착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 사람들 중에서 전사자가 생기면 면사무소로 유해가 전달되는 일이 종종 발생했는데 할머니와 부인회 회원들은 이들의 유해까지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전쟁이 끝나고 부터 할머니의 활동은 더욱 두드러졌다. 특히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으로 장려되면서 할머니는 ‘거제군 새마을 부녀회’의 초기 회장을 맡게 된다. 이때 거제지역에도 도로가 넓어지고 전 지역에 전기가 공급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이때 다른 지역과 달리 할머니가 활동하던 둔덕면 지역은 한 부락도 빠짐없이 동시에 전력 공급공사가 시행됐는데 이는 부녀회에서 절미운동으로 모은 기금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거제시 여성회관 건립 때에는 여성회관 건립에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녀회에서 저축한 기금을 밑천으로 공장에서 바가지, 수세미 등 생필품을 구입해 팔아 3,700만원의 기금을 마련, 기탁하는 등 억척스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할머니는 “지금은 별다른 활동 없이 노인정에서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늘 여성단체협의회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지금까지 거제가 발전 하는데 여성의 역할이 중요했던 만큼 양성평등과 여성의 권익이 더욱 신장 됐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할머니는 또 “오랜 시간동안 부인회 활동 등으로 가정에 소홀한 점이 많아 가족들에게 미안 했었다”며 “특히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던 둘째 며느리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할머니의 열정적인 활동은 이제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추억 속에서 머물지 모르지만 거제지역 여성운동의 틀을 마련하고 지역발전을 위해 쏟은 땀방울만은 오랫동안 기억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