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눈에 살펴보는 거제신문 20년史
한 눈에 살펴보는 거제신문 20년史
  • 거제신문
  • 승인 2009.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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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신문은 1989년 7월 21일 문공부에 등록함으로써 거제지역 최초의 지역신문의 깃발을 올리게 된다. 김경언씨가 1대 발행인을, 황송주씨가 2대 발행인을 맡았다.

1991년 2월 27일 기성신문이 신홍규씨를 발행인으로 해 새로이 태동했고 정상욱씨가 2대 발행인, 김종기씨가 3대 발행인을 맡았다. 거제지역에 두 개의 신문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3년 5월13일 양 신문사의 통합논의가 결실을 보며 김종기씨를  발행인으로 하는 통합 ‘거제신문’이 시작됐고 통합 ‘거제신문’ 박춘광씨가 2대 발행인을 맡으며 1997년까지 발행된다.

그 사이인 1994년 거제시민신문이 창간돼 지역언론은 통합 ‘거제신문’과 거제시민신문 양 신문사 체제로 다시 재편됐다. 이에 통합 논의가 다시 진행됐고 1998년 4월1일 역시 통합 ‘거제신문’이 태동했다.

그러나 통합 ‘거제신문’은 오래가지 못하고 동년 9월 21일 5개월만에 양 신문사는 다시 분리됐다. 이후 거제신문은 법인체제로의 출범을 준비, 1998년 11월 23일 (주)거제 신문으로 등록인가를 받고 김삼용 대표이사 체제로 새로이 출발하게 된다.

2001년 11월 10일 김석용 대표이사가 취임했고 2004년 3월 27일 현 김동성 대표이사가 취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거제도 태풍폭우 피해 70억    <기성신문 1991년 8월31일자 1면>

“수정저수지 붕괴, 일촉즉위기 맞기도” “인력재해에는 무력 항구적 대책 마련해야” 태풍 ‘글래디스“의 내습으로 당시 거제도의 피해가 엄청 났음을 기성신문 1면에서 보도했다.

“제12호 태풍 글래디스호의 급습으로 거제도는 총 70억원의 재산피해가 난 것으로… 22일부터 23일까지 내린 비는 장승포시가 425㎜, 거제군이 451㎜였다. 관내 최고의 강우량은 거제면의 654㎜였으며… 군 당국은 위험에 대비·서상·남동·서정·서원리 등 863세대 3,457명의 주민들을 인근 거제국민학교와 거제여상, 제일중학교 등에 분산 대피시켰으며… 이날 오후 3시경 서정리 수정저수지 퇴수로 중간지점 제방이 무너지며 퇴수로를 막아 제방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베일속의 비극, 거제도보도연맹 학살사건 <기성신문 1992년 6월20일자 3면>

기성신문 1992년 6월20일자 3면은 심층취재 형식으로 거제도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보도했다. ‘베일속의 비극, 거제도 보도연맹 학살사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기성신문은 아픈 한국의 역사, 숨죽이며 숨겨왔던 거제의 역사를 들춰냈다.

“주민 70% 좌익 낙인 무차별 학살… 굴비처럼 엮어 지심도 앞바다 수장… 40년 비극상흔 아직도 곳곳에 남아…” 등의 부제를 단 이 보도는 수장지로 지정된 지심도 앞바다와 ‘형장으로 끌려가는 행렬’이라는 사진을 공개했다. “이 섬에서 6·25전쟁 전후에 70%의 주민이 좌익으로 낙인 찍혀 수많은 무고한 양민이 무차별 학살당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 후손들마저도 수십년동안 불이익을 당하며 살아온 가슴속 깊은 앙금을 간직하고 있다.”


고현버스터미널 준공               <거제신문 1994년 11월15일자 1면>

1994년 11월15일자 거제신문 1면은 거제군민 10년의 숙원해결인 ‘고현 버스터미널 준공’기사를 실었다.

“거제군민의 숙원이던 고현 버스터미널이 오는 15일 오전 11시30분 현지에서 준공식을 갖고 16일부터 시내외 버스들이 새 터미널을 이용하게 된다” “…거제도 육상교통의 새활로를 열게 됨은 물론 터미널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가형성을 예고하고 있다”


절망… 어찌살라고-유조선 유일호 좌초    <거제신문 1995년 9월21일자 1면>

“피해액 500-700억원, 인재에 의한 사고 막을 길 없나” “지난 7월 시프린스호 좌초에 이어 맹독성 적조·청수대·태풍 등으로 청정 거제연안의 바다가 오줌 물 같이 변한채 시 관내 9,000여 양식장을 망쳐 굴 미역 우렁쉥이 등 각종 양식장을 황폐화시키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지난 21일 부산 남형제 앞바다에서 유조선 제 1유일호가 운항부주의로 좌초 침몰됐다…” “태풍 라이언의 영향으로 급기야 시 관내 능포·옥포만까지 확산됐으며 지난 24일에는 장목면 저도 앞 해상까지 기름띠가 확산됐다.”
“…방제작업에 나섰으나 근본적인 방제는 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기름유출은 계속되고… 현재로서는 이를 막을 방법이 없어 사상최대의 오염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사라져가는 내고장 명물 ‘거제견’ 그 뿌리를 찾자  <기성신문 1991년5월10일>

1991년 기성신문 5월 10일자는 사라져가는 ‘거제견’의 그 뿌리를 찾는 시리즈 보도를 시작했다. 수렵견과 가정견의 구실을 다한 거제견에 대해 국가기관 보조로 그 혈통을 보존해야한다고 기성신문은 주장했다.

“한국의 대표 견종으로는 ‘진도견’, ‘풍산견’, ‘거제견’(일명 도서견)등 4가지 종류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거제견은 사람에 대한 충성심이 타 견종에 비해 월등히 강하고 가정견과 엽견으로서도 세계 최우수견의 장점을 다 갖추고 있다. 거제견은 진도견보다 약간 큰 체구에 의젓한 모습으로 산 짐승들을 포획하면서도 가축과는 같이 놀아준다는 것이 다른 엽견과의 큰 차이점이다. …거제견만은 뚜렷이 구별한다는 것이 특이한 사실이다.” “…이렇게 우수한 독자적 기질을 가진 거제견이 기억도 되지않고 세인의 관심밖으로 밀려 났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백로 떼죽음              <거제신문 1997년 10월11일자>

“삼거리 인근 소류지 및 사두섬서 5백여마리” “생태환경보존모임, 시, 경찰 다각적인 조사 착수” “…지난 9일과 10일 사이에 이들 소류지에는 300마리 가량의 백로와 왜가리가 집단 폐사했으며 성내마을 앞 해상과 사두섬에서는 11일 200여마리에 이르는 이들 새들이 집단 폐사된채 발견되는 등 12일 현재까지 매일 수십마리씩 떼 죽음하고 있다”
“한편 거제시와 경찰은 새들의 폐사원인이  인근 성내공단의 중금속 무단방류 또는 주민들의 농약 및 독극물 살포도 있을 것으로 보고 다각적인 조사를 벌이고 있다”


“대우조선 살려야 거제가 산다”  <거제신문 1999년 4월26일자 3면>

“파업사태속 수주계약 잇따라, 해외반응은 기대 이상”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1999년 4월 19일 대우중공업 조선부문의 매각을 공식 발표하면서 대우조선은 격랑에 휩싸였다. 노동조합이 파업을 시작했고 시민대책위가 구성돼 대우조선 매각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대우조선의 기업구조개선 작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그동안의 자구노력으로 이미 완전한 흑자경영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당연히 구조조정 대상기업에서 제외될 것으로 믿었던 대우조선 근로자들과 노조는 김 회장의 발표에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면서 다음날 즉시 집회를 열고 동시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22일 들어서는 시민단체들도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반대 성명서를 내면서 23일 노조 주최 옥포매립지 대규모 집회서부터 행동을 함께하기 시작했다.”“23일 집회에서 나양주 노조위원장은 주말까지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 경우 26일부터는 투쟁수위를 높이겠다고 밝혀 대우조선소의 이번 주 상황은 전혀 예측 불허의 상태다.”


신거제대교 준공 개통        <거제신문 1999년 4월 26일자>

“준공식 통영서 개최, 시민 비난여론 계속 남아” 구거제대교의 위험이 인식되면서 새로운 대교 건설이 시작됐고 드디어 1999년 4월 신거제대교가 준공식을 갖고 본격 개통됐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개통식에 직접 참석, 축사를 하고 통영에서 거제로 첫 운행 테이프를 끊었다.

“준공식 직후 김대통령이 버튼을 눌러 다리입구에 설치된 태극문을 열면서 신거제대교는 7년의 건설공사 끝에 문을 열고 3시간여 동안 주민들에게 개방된 후 오후 6시 본격 개통됐다.” “…신거제대교에는 1만여명이 넘는 지역주민들이 몰려들어 걸어서 940m의 다리를 건너면서 준공을 자축했다.” “특히 다리이름이 신거제대교임에도 통영쪽에서 준공식을 가진 부분에 대한 비난 여론이 준공식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어 후유증으로 남고있다.”


살인적인 초속 60m‘狂風 매미’가 앗아간 거제의 가을      <2003년 9월22일자 1면>

“마을 주민들 ‘이제 어떻게 사나’ 곳곳서 통곡” 역사상 최고 큰 피해를 안겨준 태풍 ‘매미’가 추석 연휴 시민들의 마음을 할키고 농민·어민들의 삶을 피폐화시켰다. 김한겸 시장과 이영신 시의회의장이 공동으로 호소문까지 발표하며 피해복구를 독려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추석연휴였던 지난 12일 오후 6시 거제만을 기습하기 시작한 태풍 매미는 수난 최대 풍속 초속 60m라는 1908년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후 최대풍속을 기록하면서 이날 자정까지 무려 6시간 동안 거제전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13일 새벽 0시 20분께 동북쪽으로 물러났다.” “…살인적인 강풍이 엄청난 위력을 떨치면서 거제시 전역의 해변을 초토화시켰고 이로인해 13일 오전 강풍을 피해 대피했다가 마을로 돌아간 주민들은 넋을 놓고 통곡했다.” “20일 현재 전체 피해액수가 최소 1,900억원에서 최고 2,500억원대에 이를것으로 잠정 추산하고...구체적인 피해조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수산양식장도무려 214개소가 반파되거나 전파돼 사실상 지역 양식업계는 완전히 거덜이 나버린 상태다.”


거제의 노랫말 원문 밝힌다  <거제신문 2007년 3월28일자 1면 >

“무원 맏아들 한석씨 무원친필원고 거제신문에 보내와”  “거제의 노랫말 최초본 및 어휘선택 등 고뇌흔적 역력”  섬은 섬을 돌아 연연 칠백리… 거제의 노래를 작사했던 무원선생의 친필 ‘거제의 노래’ 메모가 발견돼 거제신문이 이를 보도했다.

“이 원안은 1953년 12월21일 연필로 쓴 것인데 그 위에 고친 부분을 잉크로 겹쳐 써 놓았다. 1절의 ‘삼백리’를 ‘칠백리’로 ‘오랑캐 침략에도’를 ‘반역의 무리에서’로 고쳤다.” “…‘가사내용은 경쾌 명랑한 민요조를 겨눠 거제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애틋한 향수를 주제로 했으며 극히 인상적이고 대표적인 몇가지를 등장시켰다’고 의도를 밝히고 있다.” “김한석 선생은 ‘거제의 노래 가사에 나오는 어휘 몇 가지를 들어보면 비록 거제사람이 아니더라도 가장 빼어난 우리말을 그 노래 가사에 맞게 극히 자연스럽게 선택돼 있는 신비에 놀랄 것’이라면서 ‘학식이나 분별심을 떠나 생명체의 생래와 가락은 인간과 고장의 문화정서도 누구나 바르게 깨달을 수 잇을 것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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