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현종 3年(1012) 특수행정의 공동체인 부곡제도에 따라 하청, 장목지역의 하청부곡을 두고 칠천도에 목장을 두었다.
하청면은 서북쪽 칠천도가 가로막아 어두운 호수같은 바다였으나 옛날 해안면이었다는 구전에 따라 보름달이 고요한 바다 호수에 반사되어 하늘과 땅이 밝으니 하청이라 했으며 칠천도라 개칭했다.
⊙ 하청리
고려 현종 3년(1012) 하청부곡을 두었는데 조선세종 14년(1432) 하청면을 두었고 영조 45년(1769) 坊里개편으로 하청방이었으며, 고종26년(1889) 하청과 하구리로 나뉘었다가 동32년(1895) 다시 하청리에 합치고 1915년 6월 1 일 법정리가 됐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로 서리,중리,창동,성동,의 4구였다가 1961년 10월1일 행정리가 되고 그후 신동과 신창이 신설되어 6개 행정리가 됐다.
○ 서리마을 = 본래 건너청 또는 건너 하청이라 했으며 하청의 서남쪽에 위치하니 서리라 했다.
○ 중리마을 = 하청의 동편 대금산의 줄기를 받아 본래 새앗골이라 했으며 창동과 서리의 사이에 있으니 중리라 했다.
○ 창동마을 = 본래 하청의 본 마을이고 큰 곡창이 있었음으로 창골 또는 창동이라 했다.
○ 성동마을 = 하청의 북쪽에 위치하여 본래 잿골 또는 짝골이라 했는데 용등산과 녹감산에 둘러쌓여 성안 같다하여 성동이라 했다.
○ 신동마을 = 본래 하청장터가 있었고 1913년 처음으로 면사무소를 설치하여 마을이 번창하여 신동이라 했다.
○ 신창마을 = 창동위 성동마을 밑에 위치하여 1990년대 초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신창마을을 분리했다.
○ 경충사 = 중리의 서편 골짜기에 칠원 제씨의 사당으로 정조 17年(1793) 거제도에서 맨처음 건립했으며 임진왜란때 성주목사 제말과 증 병조참판 제홍록을 모셨는데 그후 임란 선무원종공신 제인국, 억, 진 삼형제 등 5인을 모두 모셨다.

⊙ 대곡리
영조 45年(1769) 방리 개편때 칠천도방에 속했으며 고종 26年(1889) 대곡과 송포리로 분리됐는데 1915年 6月 1日 도령 제20호 법정동리령으로 대곡리가 됐으며 1942年 5月 1日 부락구제로 대곡, 송포, 황덕의 3구가 됐고 1961年 10月 1日 행정리로 됐다.
○ 대곡마을 = 칠천도의 서북단에 위치하여 본래 한실이라 했는데 이는 옥녀봉 밑 큰 골짜기 큰 마을이라 하여 대곡이 됐다.
○ 송포마을 = 칠천도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본래 솔개라 했는데 이는 송림이 울창하여 송포라 했다.
○ 황덕마을 = 대곡의 서쪽바다 황덕도의 섬마을로 면적 0.2㎢로 숲이 울창하여 크고 작은 노루가 서식함으로 누른덕 또는 노인득도라 하여 황덕도라 했다.
⊙ 덕곡리
영조 45年(1769) 방리 개편으로 내가이방이라 했는데 고종 26年(1889) 덕곡과 해안리로 분리 개칭했으며 1915年 6月 1日 덕곡리로 통합하여 법정되어 1942年 5月 1日 부락구제로 덕곡과 해안의 2구가 되어 1961年 10月 1日 행정리가 됐다.
○ 덕곡마을 = 유계평야가 있는 마을을 외가이라 했는데 이는 앞에 넓은 광이바다가 있다는 뜻이며 뒤는 큰 골짜기이므로 덕곡이라 했으며 옛날 개안, 금장, 먹개 등으로 부르고 있다.
○ 해안마을 = 하청의 서쪽 덕곡의 동쪽에 위치하여 해안따라 넓은 들이 있고 저녁노을에 밝은 햇살이 비추어 고요한 하청바다를 감싸주는 마을이라 해안으로 했다.

⊙ 석포리
영조 45年(1769) 내가이방에 속했으며 고종 26年(1889) 석포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앵산밑 서쪽에 위치하여 지형이 가파르고 돌이 많은 갯마을이라 석포 또는 돌개라 했다.
⊙ 실전리
영조45年(1769) 방리 개편으로 사외포방이라 했는데 고종 26年(1889) 실전리로 고쳤고 32年(1895) 실전과 사환리로 나뉘어 졌다가 1915年 6月 1日 실전리로 법정했으며 1942年 5月 1日 부락구제로 실전, 와항, 사환의 3구가 되어 1961年 10月 1日 행정리가 됐다.
○ 실전마을 = 본래 실밭개라 하여 사외포라 했는데 실밭이 사전, 실전으로 바뀌어졌다 하며 밭들이 많아 면화와 대마를 재배했다는 곳으로 임진왜란의 선무원종이등공신 여막동이 마을을 이룩했다는 구전이 있다.
○ 사환마을 = 하청의 북쪽 용등산 밑에 위치하여 본래 뱀곶이 사곶 또는 뱀고지라 했는데 임진왜란을 끝내고 선무원종이등공신 김옥춘이 을사년(乙巳年:1605)에 돌아 왔으니 사환으로 했다.
○ 와항마을 = 본래 왜곶이 또는 사환의 서쪽 바닷가로 외환이라 했는데 신라 시대의 기와 쪽편이 발굴됐으니 기와굴이 있었다하여 와항(瓦項)이라 했다.

⊙어온리
영조 45年(1769) 방리 개편으로 칠천도방에 속했으며 고종 26年(1889) 어온과 장곶리로 되어 1915년 6월 1일 어온리로 통합하여 법정리가 됐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로 어온, 장곶, 물안의 3구가 되어 1961년 10월 1일 행정리로 됐다.
○ 어온마을= 본래 어온개 또는 어온이라 했는데 칠천도 옥녀봉이 서북을 막아주고 송진만의 안개에 위치하여 마산내왕의 선창이 있는 따뜻한 곳이라 어온으로 했다.
○ 장곶마을 =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 430m의 바닷가에 나루터가 있는 땅끝임으로 장곶이라 했고 3개 법정리에 10개 행정리와 칠천출장소가 설치되어 차도선이 운항하고 있으나 1996년 12월 19일 칠천대교 길이 455m의 가설이 시작됐으니 멀지 않아 육지가 될 마을이며 일명 장안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장곶이 마을이다.
○ 물안마을
본래 물안개 또는 몰안개라 했는데 이는 송진만에 접하는 칠천도의 안개라는 뜻이며 선조 30年(1597) 정유재란때 7月 14日~16日의 칠천량패전으로 몰살 됐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북에 구등산이 막아 바다가 잔잔하여 편안한 갯마을 물안이다.

⊙ 연구리
영조 45年(1769) 방리 개편으로 칠천도방에 속했는데 고종 26年(1889) 연구와 외포리로 나뉘어졌다가 1915년 6월 1일 연구리로 법정 통합됐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로 연구, 곡촌, 금곡, 옥로 4구가 되어 1961년 10월 1일 행정리가 됐다.
○ 연구마을 = 칠천도 서편 광이바다에 접하여 본래 드메, 두메 또는 연구라 했는데 이는 서북에 냉질산이 막아 포구를 이룩하고 거북이 모양의 산과 바다를 상징하여 연구라 했다.
○ 곡촌마을 = 옥녀봉 밑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하여 본래 골애마을이라 했으니 곡촌으로 했다.
○ 금곡마을 = 칠천도 서남쪽에 위치하여 곡촌의 아랫마을이고 서남에 화전산이 길게 뻗어 있고 뒤의 목이 가야금 모양이라 금곡이라 했다.
○ 옥계마을 = 본래 외질개 또는 욋개라 했는데 이는 칠천도의 밖개라는 뜻이고 서남으로 뻗은 땅끝의 형세가 비녀모양이라 옥계라 했다.
○ 각시골 = 금곡마을 남쪽 꽃바구미 북쪽의 갯마을이다
⊙유계리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 개편으로 외가이방에 속했는데 고종 32年(1895) 유계와 외상리로 개칭 분리됐는데 1915年 6月 1日 부락구제로 서항, 서대, 서상, 동리의 4구(區)가 되어 1961년 10월 1일 행정리로 됐다.
○ 동리(東里)마을 = 앵산(鶯山)에서 흐르는 냇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유계(柳溪)라 했는데 그 동편에 있으니 동리(東里)라 했다.
○ 서상(西上)마을 = 유계천 상류에 위치하여 서편 윗마을이라 서상(西上)마을이다.
○ 서대마을 = 서상마을 밑에 있는 큰 마을이라 서대(西大)마을이다.
○ 서항마을 = 유계리의 북편 바닷가에 위치하여 본래 새앙몰 또는 큰골, 각곶이 등으로 불리었는데 동북에 땅끝이 있어 목이 생겼으니 서항(西項)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