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대 경남도의회 김해연 의원. 기자가 잠시 들여다본 그의 수첩은 빡빡한 일정의 연속이었다. 도의회 활동에다 지역구 주민과의 만남으로 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김 의원. 지난 2006년 최연소 의원으로 경남도의회에 입성했던 그를 지난 20일 만났다.

◆책 속에 파묻혀 살았던 학창시절
44년 전 부산광역시 전포동에서 태어난 김 의원. 그가 추억하는 어린 시절은 여타 60년대 생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개발의 기치 아래 황량하던 벌판에 고층빌딩이 들어서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팍팍한 살림 형편에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던, 그래서 늘 어려움을 달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5남1녀 중 넷째였던 김 의원은 성전초등학교와 동중학교를 거쳐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고교 3년간의 기숙사 생활은 그에게 많은 변화를 안겨다 줬다. 초·중학교 시절,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공부도 제법 잘한 그였지만 대학진학을 못한다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아픔이었다.
김 의원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집안 사정으로 공고에 입학했지만 기숙사 생활은 고역이었습니다. 나 자신의 생각과 기준이 완전히 무시되고 숨 막히는 규율 속에 통제되는 생활은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려웠지요.”
배움에 목마르던 그에게 전국최고 수준의 도서관이 학교에 있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찾았던 도서관이 그의 고교시절을 지배하게 됐다. 주말이면 집에 가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잊어버린 채 책 속에 빠졌다. 책의 두께와 종류에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읽었다.
김 의원이 말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 좌절하고 반항하지 않으며 책속에서 길을 찾고 많은 것을 배웠지요. 자료를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힘이 그 시절에 형성됐던 것 같습니다. 배움에 늘 목말라 올해 경상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만학도라 어려움이 많았는데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대우조선 입사, 노동운동에 눈뜨다
198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 의원은 19살의 나이로 대우조선에 입사한다. 당시 부산기공과 대우조선이 자매결연을 맺고 있어 자연스럽게 거제에 오게 됐다.
입사 직후 노동조합을 설립하려던 형들이 해고당하는 것을 목격한 김 의원. 암울한 시대, 힘없는 노동자들에게 힘과 방패막이가 될 수 있는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알게 됐다. 민주화 운동의 기치가 노동계에 확산된 당시 상황은 그를 역사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노동운동 1세대인 그이지만 무작정 강성으로만 치닫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논리적이고 체계화된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대우조선 노동조합 1대 부위원장직을 맡게 된다. 그의 나이 22살 때다. 어린 나이임에도 노조활동을 통해 전국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됐다고 한다. 노무현 이해찬 김문수 김근태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거물들이 그 당시 같은 길을 걸었었던 사람들이다.
“그때는 이익과 이해관계보다는 순수한 열정만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노동운동을 한 겁니다. 자본가에게 일방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노동조합의 실무책임자로 현장을 누비던 김 의원은 시민사회 활동으로 영역을 넓히게 된다. 투명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수의 목소리를 알리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거제경실련과 환경련, YMCA 등에 몸을 담으면서 시민사회활동에 주력했다.

◆거제시의원에서 경남도의원으로
2001년 김 의원은 보궐선거를 통해 제3대 거제시의원으로 의정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제도권 안으로부터의 변화가 절실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먼저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사소한 문제지만 토론과 논의를 거쳐 대안과 합의점을 찾아갔다.
거제시의 도시계획과 주거문제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4년 동안 덕산종합건설 문제에 매달려 공공청사를 거제시에 기부채납하게 했다. 대동 다숲의 진입도로 개설문제도 해결하는 뚝심을 보였다. 잘못된 일은 끝까지 파고들어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시민의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일 잘하는 시의원이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3대와 4대 거제시의원직을 역임하고 제8대 경남도의원으로 도의회에 진출했다. 누구나 당선이 힘들지 않겠느냐고 예측한 선거에서 당당히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시의원 생활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알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분들이 끝까지 저를 외면하지 않아 너무 고마웠고 아직도 보답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김 의원은 처음 경남도의회에 들어섰을 큰 규모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비단 물리적 크기만이 아니었다. 생각의 편협함과 시각의 편중화도 느꼈다. 초선 의원으로 행정절차 등에 한계를 느낄 때마다 스스로를 채찍질 하며 공부에 매진했다. 도의회와 도청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아가기 위한 노력도 병행됐다.
당시 최연소 의원이었던 그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자료와 수치를 근거로 정책질의와 도정질의, 현안질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도청 공무원들에게 김 의원의 등장을 신선한 충격이자 감당하기 힘든 새로운 적(?)의 출현이었다.
첫 도정 질문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마산시 한국철강부지 아파트 신축에 대한 특혜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주거지 변경과 오염물질 배출 등 13개 항목을 도청 담당공무원에게 들이 댔다. 담당공무원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연신 굵은 땀방울만 훔쳤다. 언론과 시민사회에서 난리가 났다. 대 히트였다.
김 의원은 말했다. “도의회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입니다.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이 펼쳐지는 곳이지요. 스스로 자극을 받으면 밤을 세워 공부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다
경남도의 정책을 변화 시킬 수 있는 도의원의 역할에 매력을 느낀다는 김 의원은 거제지역을 위한 다양한 정책추진과 예산확보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거가대교와 연결도로 공사 예산의 완벽조달을 위한 노력에서부터 지방도 1018호선 개설, 이순신 대교를 포함한 국도5호선 연장 등을 경남도 정책에 반영해 추진해오고 있다.
또 거제지역 교육시설의 현대화를 비롯, 연초고등학교와 국산초등학교 신축, 학교 체육관 설립, 냉·낭방 시설완비 등 교육인프라 구축에 힘쓰고 있다. 시장현대화 사업과 아주·유계천 정비사업에 경남도 예산을 반영했고 지역 항·포구 정비사업에 약 300억원의 도비를 확보했다.
경남도의 이순신 프로젝트에 거제시를 포함시켜 약 300억원이 투입되는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의 근간을 마련한 것도 김 의원의 역할이었다. 특히 조선산업 지원책이 전무했던 경남도에 지원책 마련을 가능케 했고 마창대교 건설사업과 관련한 문제점을 지적, 타 지자체에서 민자 사업의 재검토를 이끌어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도의회에 보내주신 거제시민에게 감사합니다. 시민들의 고마움에 보답하고, 시민들의 선택에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연인 김해연으로 돌아가더라도 열심히 일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것이 저의 솔직한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