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는 그 태생이 지방 호족의 강력한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힘은 막강했다.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편으로 제4대왕 광종(光宗)이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 과거제를 실시하지만,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는 음서(蔭敍)에 밀려 큰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조선의 과거제는 무과(武科)의 신설과 승과(僧科)의 폐지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려와 비슷하다. 과거는 대과(大科)라 불리는 문과(文科)와 소과(小科)로 나누어진다. 소과는 초시(初試)·복시(覆試)의 2단계, 대과는 다시 초시·복시·전시(殿試)의 3단계로 나누어져 있어, 모두 5단계를 거쳐야만 급제가 된다. 그러나 알성시(謁聖試) 등 5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등용되는 길도 있었다.
1차 향시에서 선발된 700명 중 복시에서 100명을 뽑아 생원·진사의 칭호를 내려주고 성균관 입학과 대과의 응시 자격을 주었다. 양자를 합해 생진시(生進試)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했는데, 문과의 예비고사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생원이나 진사는 벼슬이 아니지만 각종 부역이 면제되는 등 사회적 위상이 달라진다.
문과는 최종적으로 갑과(甲科) 3명, 을과(乙科) 7명, 병과(丙科) 23명의 33인의 합격자를 배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장원급제는 갑과 3인 중 수석을 일컫는다. 율곡 이이(李珥)는 생원시와 문과를 무려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하였다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부르기도 한다. 과거제는 조선 후기에 크게 변질되다가 갑오개혁으로 1894년 폐지된다.
고려 말기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가 과거시험 때 제출한 장원급제 답안지가 처음으로 발견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san109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