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 단상
유모차 단상
  • 거제신문
  • 승인 200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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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성 거제수필문학 회원

등 굽은 할머니 한 분이 낡고 닳은 빈 유모차를 밀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도로 양쪽에 턱이 있고, 시퍼런 눈을 깜박이며 시간을 재촉하는 신호등, 그리고 짜증스런 운전자들의 기대를 맞추기는 애초부터 글러 보인다.

때마침 스산한 늦가을 바람이 거리에 떨어진 가로수 낙엽들을 우수수 휩쓸고 지나가는 배경이 힘겨움과 무안함에 기다리는 차들을 향해 손을 두어 번 휘젓고 사라져 가는 그 할머니의 뒷모습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풍경으로 느껴짐은 아무래도 사치스런 감상인 듯 죄송스럽다.

문득 생각을 바꾸어 본다. 저 할머니는 왜 아기도 없는 빈 유모차를 밀고 가는 것일까. 무슨 연유로 성치도 않은 몸으로 유모차까지 밀고 가야 하는 것일까. 빈 유모차에는 무엇이 담겼기에 저리도 힘겨워하는 것일까. 가는 세월은 무심하고도 무상하다더니 저 할머니, 평생 동안 업고 다니던 근심 덩어리인 자식들 짝 맞춰서 내보낸 뒤 그제서야 등짐을 내려놓았다고 한시름 놓는 듯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세월이란 놈은 새파랗던 어머니의 등을 저렇게 여지없이 휘 꺾어 애골 등골 다 빠진 할머니로 만들어 놓고 그래도 모자라 고운 볼에도 깊은 주름골을 파놓고 사라져 갔는데. 아마도 고된 시집살이 와중에 짧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단칸방 시절, 그 사랑의 기억 조각들을 주섬주섬 주워 미운 세월과 함께 버무려 담아 실었을까….

유모차를 떠나 성인이 된 어제의 아기들은 할머니가 되어버린 어제의 어머니가 낡은 유모차에 새로이 태어난 손자들의 근심까지 담아 싣고 밤낮없이 밀고 다닌다는 걸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가끔씩은 배우자와 다투기 싫어서 몰래 모아둔 비상금으로 용돈이라도 보내 드리고는 있는 것일까.

한때 무슨 돈 쓸 일이 그리도 많아 갖은 핑계로든 손을 벌려야 했던, 심지어 엉터리 전보로 온 집안을 놀래키며 용돈을 타 쓰곤 했던 그 시절, 호랑이표 아버지 눈을 피해 어머니가 사립문 밖까지 따라나와 꼬깃한 쌈짓돈을 몰래 꺼내 손에 꼭 쥐어주며 다독거려 주던 기억들을 잊고 사는 것일까.

옷깃을 여미게 하는 늦가을 바람이 분다. 조금은 호사스런 유모차를 밀면서 혹은 그 안에서 방실 웃는 아이를 보면서, 어디선가 낡은 유모차를 힘겹게 밀고 있을 그 임의 모습도 가끔씩은 떠올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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