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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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제신문
  • 승인 200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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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주 거제수필문학회 회원

1962년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후 군에 갔다 오면, 취직 걱정이 태산이었다.

처음엔 제법 눈 높게 야망도 가져보지만 나중에 ‘면사무소 급사 자리라도……’ 하는 심정으로 나날을 보내던 시절이 누구나 있었던 시대였다. 초등학교 급사 한달 월급이 논을 한 마지기 살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1960년대 우리 지역에는 논 한 평에 30원 하였고, 월급은 5,000원이 넘은 것으로 기억된다. 1968년도 군청 소재지 고현은 논 한 평에 80원, 우리 고장 동부 논은 160원 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거제군청 토목계에 잠시 근무한 적이 있던 그 시절에 경찰시험을 치르러 갔다가 키가 일센티미터 모자라서 낙방한 친구가 있었다.

몇이 모여 대책을 의논한 것이 양말을 두껍게 신고 뒷꿈치에 떨어진 운동화 밑창을 풀로 붙이고 반창고로 처리하여 다시 도전하기로 하였다. 학과 시험에는 합격했으니 당연히 될 줄 알았건만 그것도 양말을 벗고 키재기를 하는 바람에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 머리를 올리자’ 밑이 안 되면 위로 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우선 머리를 길게 길렀고, 시험 치러 가는 날에 머릿밑에 고약을 몇 봉지 두툼히 붙였다.

그 시절 이발관에서는 머리를 다듬을 때 ‘고대기’라는 것을 사용하여 머리를 지지곤 하였는데, 그 고데기로 머리를 감쪽같이 정리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삼 센티는 올린 것 같았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때부터 그 친구는 당당한 국가 공무원으로 여정이 시작됐고, 힘들게 합격한 만큼 열심히 근무하였다.

모두가 박수 치고 격려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그 후 그는 종종 ‘고약순경’이라는 별명을 들었지만 그는 당당하게 국립경찰 간부로서 국가에 봉사하고 명예롭게 퇴직했다.

이제 그는 나와 둘도 없는 친구로서, 나와 마주 앉아 인생을 논하고, 지난 세월을 그리워하며 전국 일주 여행도 해보건만 할 일 많던 젊은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곤 한다.

세월은 인생을 주름지게 만들고 저녁노을을 쳐다보며 아직도 저 노을처럼 붉은 정열을 논할 수도 있는데, 주위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러워 해도 시간은 흘러 노을은 어느새 칠흑 같은 밤이 되어 버린다.

올해에도 수많은 졸업생이 좁은 취업문을 기웃거린다. 모두 뜻대로 취업이 되기를 바라면서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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