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狎鷗亭)
압구정(狎鷗亭)
  • 거제신문
  • 승인 200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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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는 1993년 엄정화, 최민수 주연의 영화로 인해 압구정은 강남문화의 1번지로 유명해졌다.

이제 「압구정」이란 트랜드는 젊은 세대들의 욕망과 취향을 반영하는 유흥문화의 이미지와 귀족소비의 대명사 그리고 놀이와 유행을 창출하는 특정한 거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본디 압구정은 조선 세조 때 권신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세운 정자 이름이다. 한명회는 어떤 사람인가? 수양대군과 모의하여 김종서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 1등 공신을 비롯하여 네 번이나 1등 공신에 책봉되었고,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 국구(國舅)가 되었고, 벼슬은 영의정에 올라 평생 동안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나중에 연산조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 사람이다.

압구정은 송(宋)나라 승상(丞相) 한충헌(韓忠獻)이 새 황제를 세우고 자신은 초야에 묻혀 살면서 갈매기와 살겠다는 의미로 지는 정자 이름인데, 한명회가 이를 본떠 자기 정자 이름도 압구정으로 했다.

세종 때 청백리 방촌(尨村) 황희(黃喜) 정승이 압구정에서 별로 멀지 않는 파주 임진강가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작은 정자를 짓고 노년을 보낸 곳이 있다. 반구정의 반(伴)이나 압구정의 압(狎)은 다 「벗하다」「가깝다」등의 뜻이 있지만 압(狎)의 속뜻은 높은 데서 거들먹거리며 친한 거고, 반(伴)은 두 존재가 평등한 위치에서 가까운 것이다. 부부를 반려자(伴侶者)라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구정은 아직도 갈매기가 찾아오는 정자지만, 압구정은 여러 주인을 거치다 구한말 개화파 정치가 박영효(1861~1939)의 소유였다가 갑신정변(1884) 주모자로 몰리면서 허물어졌고, 지금은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안에 표지석만 남아있다.

조선 최고의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실려 있는 그림을 바탕으로 압구정이 다시 복원된다고 한다. 그런데 정선의 그림을 보면 작은 정자가 아니라 누(樓)나 각(閣)의 별장 수준인 것 같다.(san109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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