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압구정」이란 트랜드는 젊은 세대들의 욕망과 취향을 반영하는 유흥문화의 이미지와 귀족소비의 대명사 그리고 놀이와 유행을 창출하는 특정한 거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본디 압구정은 조선 세조 때 권신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세운 정자 이름이다. 한명회는 어떤 사람인가? 수양대군과 모의하여 김종서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 1등 공신을 비롯하여 네 번이나 1등 공신에 책봉되었고,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 국구(國舅)가 되었고, 벼슬은 영의정에 올라 평생 동안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나중에 연산조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 사람이다.
압구정은 송(宋)나라 승상(丞相) 한충헌(韓忠獻)이 새 황제를 세우고 자신은 초야에 묻혀 살면서 갈매기와 살겠다는 의미로 지는 정자 이름인데, 한명회가 이를 본떠 자기 정자 이름도 압구정으로 했다.
세종 때 청백리 방촌(尨村) 황희(黃喜) 정승이 압구정에서 별로 멀지 않는 파주 임진강가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작은 정자를 짓고 노년을 보낸 곳이 있다. 반구정의 반(伴)이나 압구정의 압(狎)은 다 「벗하다」「가깝다」등의 뜻이 있지만 압(狎)의 속뜻은 높은 데서 거들먹거리며 친한 거고, 반(伴)은 두 존재가 평등한 위치에서 가까운 것이다. 부부를 반려자(伴侶者)라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구정은 아직도 갈매기가 찾아오는 정자지만, 압구정은 여러 주인을 거치다 구한말 개화파 정치가 박영효(1861~1939)의 소유였다가 갑신정변(1884) 주모자로 몰리면서 허물어졌고, 지금은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안에 표지석만 남아있다.
조선 최고의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실려 있는 그림을 바탕으로 압구정이 다시 복원된다고 한다. 그런데 정선의 그림을 보면 작은 정자가 아니라 누(樓)나 각(閣)의 별장 수준인 것 같다.(san1090@hanmail.net)